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 인천 (문단 편집) ===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 === 먼저 제작 시기부터가 최악이었는데 1977년 당시는 [[베트남 전쟁]] 패전 직후라 반전 풍조가 강해 전쟁 영화의 빙하기였고[* 당시 히트한 전쟁물이 없는 것은 아니나 '''《[[람보(영화)|람보]]》''', 《[[머나먼 다리]]》, 《[[디어 헌터]]》 등 거의가 [[반전]]영화였다. 특히 람보는 반전영화 중에서도 특히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군인을 강조하는 영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박동선 사건으로 시작된 '[[코리아게이트]]' 때문에 [[한미관계]]가 사상 최악으로 냉각된 시기였다. 거기에다 통일교에 대한 [[미국]] 내 시각은 처음부터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장 맥아더 역을 맡은 로렌스 올리비에부터가 문선명이 지나치게 통일교 교리를 강조해대서, "통일교를 믿기 싫어!"라고 뻗대는 바람에 영화 제작팀에서 올리비에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으며, 건강 문제까지 겹쳤던 그는 영화를 엄청나게 건성으로 찍었다. 그나마 개런티는 주급으로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재촬영을 진행해 많이 줘서 촬영 자체를 거부하진 않았다.[* 매주 현찰을 헬리콥터로 공수해 와서 지불했다고도 한다. 사실 올리비에는 이 영화를 찍기 직전 사경을 헤매는 대수술을 받았는데, 이 수술 때문에 재산을 엄청나게 탕진한 상태였다. 즉, 이 영화를 찍을 수 밖에 없었다. 개런티가 많았어도 올리비에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보이콧을 했을 것이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이러한 전후 상황 때문에 개런티를 받지 못할까 염려하여 보이콧 움직임을 보이자[* 원래 내정되었던 [[제임스 메이슨]]은 출연을 철회하였고, [[인도군]] [[장교]]로 나올 예정이던 [[오마 샤리프]]와 데이비드 젠슨은 도중에 촬영을 보이콧하고 돌아갔다. 나중에 샤리프는 [[이집트]] [[텔레비전]]에 나와서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쓰레기같은 영화출연이었다고 화를 냈다. 더불어 영화 제작진에게 자신이 나온 부분은 일절 공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데이비드 젠슨은 이게 [[유작]]이 되어버렸다. 1980년 2월, 만 48세 나이로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기 때문.] 헬기로 매주 개런티가 들어있는 돈가방을 공수해 와 건네주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제작 협력을 약속한 미 국방부도 영화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협조를 철회했고, 원래 맥아더로 예정되었던 [[그레고리 펙]]은 출연을 취소한다.[* 이 배우는 맥아더 전기 영화에서 레퍼런스급의 명연기를 펼친 바 있다.] 심지어 미국 뿐 아니라 [[제5공화국|5공 정부]]도 통일교 영화라는 이유로 공권력 협조에 미온적이었다. 게다가 문선명이 자꾸 제작에 관여하는 바람[* 가장 가관은 영화 시작 제작진 자막에 자기 이름이 안 나온다고 기어코 돈을 더 들여가면서까지 특별 자문이라는 자막으로 문선명 영어 이름을 자막으로 넣은 점. '''이 덕에 30만 달러가 또 들어갔다.''' 자막 하나로 이렇게 돈이 들어가다니 가히 [[돈지랄]]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렇다 보니 해외 언론들도 문선명 이름 자막만 보고 통일교 영화라고 무진장 깠다. 그 자막을 안 봤어도 '''틀림없이 그 괴악한 퀄리티를 소재로 마구 깠겠지만'''.][* 참고로 문선명은 1981년 미국에서 탈세 혐의로 각종 소송에 휘말렸고, 결국 1984년부터 몇년간 [[코네티컷 주]]의 댄버리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에 각본은 제작 기간 내내 수정을 거듭했으며, 이로 인해 영화 촬영 내내 수많은 트러블이 이어졌다. 가만히 냅둬도 제작진이 알아서 잘 찍는데도 불구하고, 콘티를 스스로 뭉개며 영화를 산으로 보냈다. 심지어 촬영을 위해 만든 등대가 서해안을 타고 올라온 [[태풍]]으로 날아가는가 하면, 미국 스태프와 한국 스태프를 연결할 통역이 부족하여 한 컷을 찍기 위해 통역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헤메는 동안 시간만 하염없이 흘렀고, 영화 제작자들이 쓰는 전문 용어는 한국과 미국이 전혀 달라 감독 지시가 이곳저곳 거치는 동안 전혀 다른 말이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현장 조감독이 배를 다른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바람에 인천 상륙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찍으며 200만 달러를 썼고, 맥아더가 서울 시내에서 군중의 환호를 받는 장면은, 한 번은 엑스트라가 너무 적어서 멋지지 않다는 이유로 다시 찍고, 많은 엑스트라가 동원된 두 번째 촬영은 첫 번째로 찍은 리무진 장면과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또 다시 찍어서 도합 세 번을 찍었다. 여기에 든 돈은 촬영당 100만 달러씩 해서 300만 달러. 결국 5년 만에 겨우 완성을 보았으나, 그 결과는 덧칠과 가위질로 얼룩진 각본은 물론이거니와 배우들의 연기도 들쭉날쭉하는 등 말 그대로 쓰레기가 탄생했다. 출연한 배우들도 실컷 비웃기까지 했다.[* 재클린 비셋은 이 영화로 165만 달러나 벌었음에도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나와 "난 이 영화를 볼 마음도 없어요. 얼마나 개판이던지 말도 못하던 걸요. 하긴 돈 때문에 나온 것 뿐이니까요"라며 실컷 비웃고 까버렸다.] [[고증]] 역시 군이나 사학계에서 들고 일어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로 막장이다. 일단 6월 25일 새벽에 [[조선인민군]]이 38선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실제 역사와는 달리, [[조선인민군 육군]] [[전차]]들이 '''백주대낮에''' [[대한민국 육군]]의 최전방 초소에 당당하게 쳐들어와 탁자에서 소총을 장전하던 한국 육군 [[보병]]들을 쓸어버리는 아스트랄한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여기에 인공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한 북한 전차는 바로 옆에 있는 멀쩡한 길을 놔두고 궤도로 민가를 밟아 뭉개며 지나가고, 한복을 입은 선량한 주민들이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전차를 향하여 짱돌만 던지다가 --[[팔레스타인/역사#s-8.1|{{{#gray 인티파타?}}}]]-- 북한군의 포질에 산화하는 등 현실성 없는 모습도 등장. 여기에 국군이나 조선인민군이나 둘 다 일본군 비슷한 복장에, 영국군이 쓰던 [[스텐 기관단총]]을 쓴다.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만큼 전쟁씬은 제법 웅장해야 함에도 굉장히 이질적일 정도로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오리지널인 140분판은 첫 공개였던 [[칸 영화제]]에서 엄청난 야유를 받으며 떡실신되었고, 나중에 재편집판이 미국 한정으로 공개되었으나 상영 기간 중 극장 티켓을 추첨하여 100만 달러 상금을 주는 캠페인을 벌였음에도 영화는 대참패, 90만 달러라는 [[반어법|기념비적인 흥행 수입]]을 기록하며 영원한 [[흑역사]]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더니 결국 미국 배급사였던 [[MGM/UA]]는 이후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다 1989년 1차 부도를 내고 2010년 11월 파산했다.[* 참고로 이 부도, 파산으로 [[007 시리즈]]는 신작 계획이 두 번이나 날아갔다. 007 영화 시리즈 팬이라면 이를 갈 만한 영화. 게다가 그 중 한 번은 시나리오가 나온 상황이었다.] 거기에 1981년 7월 22일에 윤보살이 피살당하면서[* 해당 사건은 현재도 미제로 남아 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77/0003799878|윤씨가 해당 영화에 투자를 했다는 얘기가 나왔으나,]] 제작사 측은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76543|사실무근이라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